예루살렘의 키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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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의 키릴로스는 4세기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예루살렘의 주교였다. 그는 315년경에 태어나 기독교 신학 및 고대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으며, 350년경 예루살렘 주교가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와 갈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추방과 복귀를 반복했고,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여하여 '호모우시우스' 용어 수용에 찬성했다. 그는 세례 교육과 관련된 저술을 남겼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신학 사상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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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키릴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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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한국어) |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
이름 (영어) | Cyril of Jerusalem |
이름 (그리스어) | Κύριλλος Α΄ Ἱεροσολύμων |
이름 (라틴어) | Cyrillus Hierosolymitanus |
존칭 | 성인 |
생애 | |
출생 | 경 |
출생지 | 카이사레아 마리티마 근처, 시리아 팔레스티나 (추정) |
사망 | 386년 |
사망지 | 예루살렘, 시리아 팔레스티나 |
종교 활동 | |
직함 | 주교 고해자 교회 박사 |
기념일 | 3월 18일 (동방 기독교, 가톨릭 교회) 5월 7일 (동방 기독교 (기적)) 파렘하트 22 (콥트 정교회) |
숭배 대상 |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
2. 생애
키릴로스는 335년경 주교 마카리우스에게 부제로 서품되었고, 약 8년 후 주교 막시무스에게 사제로 서품되었다. 350년경 막시무스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7][8][9]
예루살렘 교구장 주교였던 카이사레아의 아카키우스와 키릴로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카키우스는 키릴로스를 교회 재산 매각 혐의로 기소했다.[12] 당시 예루살렘 시는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고 있었는데, 교회 역사가인 소조멘과 테오도레토스는 "키릴로스가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을 막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세례 의식을 집행할 때 주교가 입도록 기증한 금실로 만든 교회 성물과 귀중한 성직 예복을 몰래 팔았다"고 전한다.
키릴로스는 아카키우스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2년 동안 버텼지만, 357년 아카키우스의 영향력 아래 열린 교회 회의에서 해임되어 타르수스로 피신했다.[13] 359년, 셀레우키아 공의회는 키릴로스를 복직시키고 아카키우스를 해임했다. 360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이를 다시 뒤집었고,[14] 키릴로스는 율리아누스 황제 즉위 후 361년에 귀환할 수 있을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다시 1년 동안 추방되었다.
367년 아리우스파 황제 발렌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다시 추방되었지만, 378년 발렌스가 사망한 이후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386년 사망할 때까지 예루살렘 주교직을 유지했다. 380년,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전년도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의 권고에 따라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는 신앙은 좋은 상태라고 보았지만, 도시가 당파에 시달리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을 걱정했다.[15]
2. 1. 초기 생애
키릴로스의 주교 서품 이전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315년경으로 추정되는 출생 연도도 추측에 불과하다.[5] 버틀러에 따르면, 키릴로스는 예루살렘 시 또는 그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의 저술과 고대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다.[6]키릴로스는 335년경 주교 마카리우스에 의해 부제로 서품되었고, 약 8년 후 주교 막시무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350년경 막시무스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구의 주교가 되었는데, 이는 키릴로스가 저술한 ''교리 강론''에서 스스로를 "주교"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다. 예로니모 또한 이 시기에 키릴로스가 아리우스주의자였다고 시사한다.[7][8][9]
순례자 에게리아는 키릴로스를 설교자이자 전례학자로 묘사했다.[10]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고행 생활을 하다가 346년경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 후 카이사리아 마리티마의 주교 아카키우스와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오스(en)의 요청을 받아 전임자 막시모스(en)의 뒤를 이어 351년에 예루살렘 주교가 되었다.
2. 2. 주교 서품과 갈등
키릴로스는 335년경 주교 마카리우스에 의해 부제로 서품되었고, 약 8년 후 주교 막시무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7] 350년경 막시무스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구의 주교가 되었는데, 이는 키릴로스가 저술한 ''교리 강론''에서 스스로를 "주교"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다.[7][8][9] 예로니모 또한 이 시기에 키릴로스가 아리우스주의자였다고 시사한다.[7][8][9] 순례자 에게리아는 키릴로스를 설교자이자 전례학자로 묘사했다.[10]카이사레아의 아카키우스와 키릴로스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카키우스는 정통파 역사가들에게 아리우스파의 지도자로 묘사되며, 이들은 350년대에 키릴로스에 대한 그의 반대가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소조멘은 또한 긴장이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해 키릴로스의 교구에 부여된 중요성에 대한 아카키우스의 질투심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카이사레아가 위협을 받았고, 이곳이 주요 기독교 성지가 되어 순례의 중심지가 되면서 더욱 커졌을 수 있다고 시사한다.[11]
아카키우스는 키릴로스를 교회 재산 매각 혐의로 기소했다.[12] 예루살렘 시는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었고, 이때 교회 역사가인 소조멘과 테오도레토스는 "키릴로스가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세례 의식을 집행할 때 주교가 입도록 기증한 금실로 만든 교회 성물과 귀중한 성직 예복을 몰래 팔았다"고 보고했다.
키릴로스는 아카키우스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2년 동안 버텼지만, 357년에 아카키우스의 영향력 아래 열린 교회 회의에서 키릴로스는 부재중에 해임되었고, 타르수스의 주교 실바누스에게 피신했다.[13] 이듬해인 359년, 아카키우스에게 더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셀레우키아 공의회는 키릴로스를 복직시키고 아카키우스를 해임했다. 360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이를 다시 뒤집었고,[14] 키릴로스는 황제 율리아누스의 즉위로 361년에 귀환을 허용할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다시 1년 동안 추방되었다.
키릴로스는 367년 아리우스파 황제 발렌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다시 추방되었지만, 발렌스의 죽음 이후 378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이후 386년 사망할 때까지 방해받지 않았다. 380년,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전년도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의 권고에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 그는 신앙이 좋은 상태라고 보았지만, 도시가 당파에 시달리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을 걱정했다.[15] 예루살렘에 대한 키릴로스의 관할권은 그가 참석했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에 의해 명시적으로 확인되었다.[22] 그 공의회에서 그는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확신하고 ''호모우시우스''( "성부"와 "성자" 사이의 본질을 정의하는)라는 용어의 수용에 찬성표를 던졌다.[1] 그의 이야기는 처음에 니케아를 불신했지만 결국 그 공의회의 신조와 ''호모우시온'' 교리를 받아들인 동방 주교들(아마도 다수)을 가장 잘 대표한다.[16]
2. 3.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0년,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전년도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의 권고에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 그는 신앙이 좋은 상태라고 보았지만, 도시가 당파에 시달리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을 걱정했다.[15] 예루살렘에 대한 키릴로스의 관할권은 그가 참석했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에 의해 명시적으로 확인되었다.[22] 그 공의회에서 그는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확신하고 ''호모우시우스''( "성부"와 "성자" 사이의 본질을 정의하는)라는 용어의 수용에 찬성표를 던졌다.[1] 그의 이야기는 처음에 니케아를 불신했지만 결국 그 공의회의 신조와 ''호모우시온'' 교리를 받아들인 동방 주교들(아마도 다수)을 가장 잘 대표한다.[16] 그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제2차 세계 공의회)에 참가했다.[38]3. 신학 사상
키릴로스는 동방 교부들의 일반적인 입장을 취하여 죄는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보았다. 육체는 죄의 원인이 아니라 도구이며, 죄에 대한 치료법은 회개라고 강조했다.[15] 그는 진정한 기독교에 필수적인 높은 도덕적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17]
키릴로스는 저술에서 세례를 받으려는 자(계몽자)와 새로 세례를 받은 자를 위한 가르침을 제시했다. 이 가르침에서는 교리, 식례 설명, 성사(성사・성례)에 대한 내용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의 저작에는 성모(테오토코스)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다.[38]
아리우스파, 사벨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영지주의, 유대교와 같은 이단에 대한 논박도 저술에 포함되어 있지만, 격렬한 어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평가받는다.[38]
키릴로스는 재림을 고대하며 "그분은 첫 번째 오심에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수치를 멸시하셨고, 두 번째 오심에서는 천사들의 군대에 둘러싸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첫 번째 오심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분의 두 번째 오심도 기다립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을 끝내고 창조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재림을 기대했다. 그는 재림 때 지상에서의 삶이 끝난 후 부활할 것을 기대했다.
3. 1. 니케아 신조와 호모우시오스 교리 옹호
키릴로스의 신학은 초기에는 표현이 다소 모호했지만, 결국 니케아 정통주의에 완전히 동의했다. 논쟁의 중심에 있던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구절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성부수난설, 사벨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아리우스파가 주장하는 "아들이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주장을 명확히 거부했다.[15]3. 2. 성육신과 성찬례
키릴로스는 성찬례에 대해 빵과 포도주는 단순한 요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가르쳤다.[17] 어떤 이들은 그가 강력한 현실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때로는 상징적인 견해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평가한다.[17]키릴로스의 저술은 4세기의 성체 예식에서의 희생의 정리(교리)를 비롯하여, 당시 교회에서의 예배 생활을 보여준다.[37] 19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 필라레트는 키릴로스의 전례에 대한 가르침이 현대 정교회의 전례와 매우 가깝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세례성사와 성유 도포 성사를 분리하지 않고 연속해서 행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필라레트는 이를 통해 당시와 전례가 크게 다르다고 정교회가 생각하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했다.[38]
3. 3. 성령의 치유와 갱생
키릴로스의 저술은 당시에는 드물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본성을 다루고 있다. 그는 "성령은 부드럽게 오셔서 그 향기로 자신을 알리신다. 그분은 짐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하나님은 가볍고 매우 가볍기 때문이다. 빛과 지식의 광선이 성령이 다가오기 전에 쏟아진다. 성령은 진정한 친구의 부드러움으로 와서 구원하고, 치유하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강하게 하고, 위로한다"와 같이 용서와 성령의 치유력에 대해 훌륭하게 묘사했다.[18] 키릴로스 자신도 평생 동안 하나님의 용서라는 메시지를 여러 번 따랐는데, 이는 키릴로스가 불명예를 겪고 그의 지위와 백성을 뒤로하고 떠나야 했던 두 번의 주요 유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잘못한 사람들에게 어떤 악의도 품지 않았다. 키릴로스는 그의 교리 문답에서 치유와 재생이라는 주제를 강조했다.[18]3. 4. 종말론
오데드 이르샤이는 키릴로스가 기독교인들이 모든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 재해에서 종말론적 의미를 찾으려고 열망하던 격렬한 종말론적 기대의 시대에 살았다고 지적했다. 키릴로스는 예루살렘에서 간헐적인 추방 생활을 하면서 주교직의 상당 부분을 보냈다. 에이브러햄 말허브는 지도자가 공동체에 대한 통제력이 취약할 때, 적그리스도의 임박한 도래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효과적으로 그 취약성으로부터 주의를 돌린다고 주장했다.[28]키릴로스는 임명된 직후인 351년에 작성한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내는 서신''[25]에서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이 목격한 골고다 언덕 상공의 하늘에 나타난 빛의 십자가에 대해 기록했다. 그리스 교회는 이 기적을 5월 7일에 기념한다. 현대에는 이 ''서신''의 진위 여부가 ''호모우시우스''라는 단어가 마지막 축복에 나타난다는 이유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나중에 삽입된 것일 수 있으며, 다른 내부 증거에 근거하여 서신의 진위성을 인정한다.[26]
키릴로스는 이것을 곧 마그넨티우스라는 찬탈자에게 맞서야 할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지지의 징표이자, 곧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재림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놀랍지 않게도, 키릴로스의 종말론적 분석에서 예루살렘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27]
마태복음 24장 6절은 종말의 징표로 "난리와 난리의 소문"에 대해 말하며, 키릴로스는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이러한 맥락에서 읽었다. 마태복음 24장 7절은 "곳곳에 지진"에 대해 말하며, 예루살렘은 율리아누스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려던 시기에 363년에 지진을 겪었다.[28] 카이사레아의 아카키우스와의 주교좌 간 상대적 우선 순위를 놓고 경쟁하며, 키릴로스는 심지어 교회적 불화조차 주님의 오심의 징표로 여겼다.[29] 교리 문답 15는 율리아누스를 적그리스도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르샤이는 이를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본다.[28]
키릴로스는 "그분은 첫 번째 오심에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수치를 멸시하셨고, 두 번째 오심에서는 천사들의 군대에 둘러싸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첫 번째 오심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분의 두 번째 오심도 기다립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을 끝내고 창조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재림을 고대했다. 그는 재림 때 지상에서의 삶이 끝난 후 부활할 것을 기대했다.
4. 주요 저작
예루살렘의 키릴로스는 세례 전후의 예비 신자들에게 23개의 강의를 했는데, 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18개는 ''교리 강의'', ''교리 설교'', ''교리 강론''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지막 다섯 개는 성사를 다루기 때문에 ''신비 교리''(μυσταγωγικαί)라고 불린다.[19]
키릴로스의 교리 강의(그리스어: Κατηχήσεις, ''Katēchēseis'')[20]는 세례 전후 예비 신자들을 위한 강의로,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주요 주제를 대중적으로 설명하고, 따뜻한 목회적 사랑과 배려를 담고 있다. 각 강의는 성경 구절에 기초하며, 신조 설명과 함께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받아들여지던 이단 논쟁도 다룬다.[22]
키릴로스는 원죄와 예수의 희생, 3일 후의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아버지의 사랑을 증명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을 배신하고 처형에 가담한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다고 강조했다.
''비밀 교리 교육''은 키릴로스가 새로 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행한 것이다.[30] 이 교육은 370년대 또는 380년대에 쓰여졌다고 추정된다.[31]
키릴로스의 저술에는 4세기 성체 예식에서의 희생 교리를 비롯한 당시 교회의 예배 생활이 나타나 있으며, 아리우스파, 사벨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영지주의, 유대교와 같은 이단에 대한 논박도 포함되어 있다.[38]
19세기 러시아 정교회 체르니고프 대주교 필라레트는 키릴로스의 가르침이 현대 정교회 전례와 매우 가깝다고 보았다. (예: 세례 성사와 성유 도포 성사를 분리하지 않고 연속해서 행하는 것) 그는 이를 통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했다.[38]
메이지 시대 일본 정교회는 키릴로스의 저작 전역을 출판했으며(1903년), 국립국회도서관 근대 디지털 라이브러리에서 [ 『예루살렘의 대주교 성 키릴 전서』]로 열람할 수 있다. 헤이본샤의 『중세 사상 원전의 집성 2 성기 그리스 교부』에도 「세례 지원자를 위한 비밀 교화」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4. 1. 교리 강론 (Catechetical Lectures)
예루살렘의 키릴로스가 세례를 받기 전후의 예비 신자들에게 행한 23개의 강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18개의 강의는 ''교리 강의'', ''교리 설교'', ''교리 강론''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지막 다섯 개의 강의는 성사를 다루기 때문에 ''신비 교리''(μυσταγωγικαί)라고 불린다.[19]그의 교리 강의(그리스어: Κατηχήσεις, ''Katēchēseis'')[20]는 대략 서기 350년경 또는 키릴로스가 사제로서 주교 막시무스를 대리하던 348년경에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21] ''교리 강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바실리카인 ''마르티리온''에서 행해졌다.[16] 이 강의들은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주요 주제에 대해 대중적인 방식으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비 신자들에 대한 따뜻한 목회적 사랑과 배려로 가득 차 있다. 각 강의는 성경 구절에 기초하며, 성경 인용이 풍부하다. ''교리 강의''에서는 신조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받아들여지던 이단적인 오류들에 대한 논쟁이 펼쳐진다. 이 강의들은 당시의 교육 방법과 이 시기의 전례적 실천에 대한 가장 완전한 기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22]
우리,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명된 사람들 사이에서만 신앙의 존엄성이 큰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 심지어 교회 밖의 사람들의 일까지도 신앙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앙을 통해 결혼은 서로 낯선 사람들을 결합시킨다. 신앙을 통해 농업이 유지된다. 사람은 수확을 거둘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그 과정에서 겪는 노고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앙을 통해 항해자들은 작은 나무 배에 자신을 맡기고, 육지의 굳건한 요소와 파도의 불안정한 움직임을 교환한다.|우리,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믿음의 존엄성이 큰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 심지어 교회 밖의 사람들의 일까지도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믿음을 통해 결혼은 서로 낯선 사람들을 결합시킨다. 믿음을 통해 농업이 유지된다. 사람은 수확을 거둘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그 과정에서 겪는 노고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항해자들은 작은 나무 배에 자신을 맡기고, 육지의 굳건한 요소와 파도의 불안정한 움직임을 교환한다.grc [23]
13번째 강의에서 예루살렘의 키릴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에 대해 논한다. 이 강의의 주요 주제는 원죄와 예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다. 3일 후의 매장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아버지의 사랑을 증명한다. 키릴로스는 예수께서 모든 것을 알고 자발적으로 죽음에 이르셨다고 주장했다. 그분은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 유지하고, 자신을 배신하고 처형에 가담한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다. 키릴로스는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 입에는 거짓이 없었으며, 모욕을 당해도 모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해도 위협하지 않으셨다"라고 썼다. 이는 예수의 자기희생에 대한 키릴로스의 믿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강의는 예수께서 처형당하는 동안 느꼈을 감정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키릴로스는 예수께서 처형 전에 삶에서 말씀하신 메시지들을 마지막 행위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키릴로스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주었고,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주었으며, 침 뱉음을 당하는 수치를 피하지 않았다"라고 썼다. 이것은 다른 뺨을 돌리고 폭력에 대해 손을 들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다니엘루는 세례 의식이 종말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세례를 받기 위해 기록하는 것은 하늘의 선택된 자들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과 같다."[24]
세례를 받으려는 자(계몽자), 세례를 새로 받은 자에 대한 계몽의 가르침이 키릴로스의 저술 내용이다. 이 계몽의 가르침에서는 정리(교리)의 가르침, 식례의 설명, 성사(성사・성례)에 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 성모(테오토코스)라는 용어도 저작에 사용되고 있다.[38]
아리우스파, 사벨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영지주의, 유대교와 같은 이단에 대한 논박도 저술에 포함되어 있다.[38]
키릴로스의 저술에는 4세기의 성체 예식에서의 희생의 정리(교리)를 비롯한, 당시 교회에서의 예배 생활이 나타나 있다.[37]
4. 2.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내는 서신
키릴로스는 임명된 직후 351년에 작성한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내는 서신''[25]에서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이 목격한 골고다 언덕 상공의 하늘에 나타난 빛의 십자가에 대해 기록했다. 그리스 교회는 이 기적을 5월 7일에 기념한다. 현대에는 이 ''서신''의 진위 여부가 마지막 축복에 나타나는 ''호모우시우스''라는 단어 때문에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나중에 삽입된 것일 수 있으며, 다른 내부 증거에 근거하여 서신의 진위성을 인정한다.[26]키릴로스는 이것을 마그넨티우스라는 찬탈자에게 맞서야 할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지지의 징표이자, 곧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재림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놀랍지 않게도, 키릴로스의 종말론적 분석에서 예루살렘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27]
5. 유산과 영향
키릴로스의 저술은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과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교리, 식례 설명, 성사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하고, 성모(테오토코스)라는 용어도 사용된다.[38]
키릴로스는 아리우스파, 사벨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영지주의, 유대교와 같은 이단을 논박했지만, 격렬한 어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38]
키릴로스의 저술에는 4세기의 성체 예식에서의 희생 교리를 비롯하여 당시 교회의 예배 생활이 나타나 있으며, 신앙 내면의 신비에 대한 전통적인 침묵의 자세도 보여진다.[37]
5. 1. 현대적 의의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정교회에서 예루살렘의 키릴로스의 저작 전역이 출판되었으며(1903년), 국립국회도서관의 근대 디지털 라이브러리에서 열람이 가능하다.[38] 헤이본샤에서 출판한 『중세 사상 원전의 집성 2 성기 그리스 교부』에도 「세례 지원자를 위한 비밀 교화」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키릴로스의 저술은 세례를 받으려는 자와 새로 받은 자에 대한 계몽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가르침에서는 교리, 식례 설명, 성사(성사・성례)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하며, 성모(테오토코스)라는 용어도 사용된다.[38]
키릴로스는 아리우스파, 사벨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영지주의, 유대교와 같은 이단을 논박하지만, 격렬한 어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38]
키릴로스의 저술에는 4세기의 성체 예식에서의 희생 교리를 비롯하여 당시 교회의 예배 생활이 나타나 있으며, 신앙 내면의 신비에 대한 전통적인 침묵의 자세도 보여진다.[37]
19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체르니고프 대주교 필라레트는 키릴로스의 식례(전례) 가르침이 현대 정교회 전례와 매우 가깝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세례 성사와 성유 도포 성사를 분리하지 않고 연속해서 행하는 것 등을 통해, 필라레트는 키릴로스의 가르침이 당시와 식례가 크게 다르다고 정교회가 여기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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